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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박스트롤>속 편견 은유 /편견/계급 구조와 위선/다양성과 포용

by talk11119 2025. 9. 17.

2014년 라카 스튜디오(Laika Studios)가 제작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박스트롤(The Boxtrolls)’은 겉으로 보기엔 독특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아동용 판타지 같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현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비판이 담겨 있다. 특히 작품은 ‘박스트롤’이라는 존재를 통해 타자화, 편견, 계급주의 같은 무거운 사회적 주제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며,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을 빌려 깊은 메시지를 전달한다. 본 글에서는 애니메이션 박스트롤 속에 숨어 있는 편견에 대한 은유와 그것이 어떻게 사회 구조, 다양성, 계급 문제와 연결되는지를 분석한다.

 

박스트롤

박스트롤이라는 존재: 타자화된 편견의 집합체

작품의 주요 배경은 ‘치즈브리지(Cheesebridge)’라는 도시다. 이 도시는 매우 계급적이며 폐쇄적인 사회로 묘사되며, 지하에는 인간들과는 전혀 다른 생물인 ‘박스트롤’이 산다. 박스트롤은 본래 평화롭고 지적인 생명체로, 인간이 버린 쓰레기를 재활용하고 기계장치를 고치는 데 능숙하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들을 ‘아이를 납치하는 괴물’로 간주하고 두려워한다. 이는 사실이 아니며, 극 중 인간들은 박스트롤을 단 한 번도 제대로 관찰하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에 대한 편견은 루머와 조작된 정보, 그리고 권력자들의 선동으로 만들어진 허상이다.

이러한 설정은 명백하게 현실 사회의 편견 구조와 유사하다. 외모나 문화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소수 집단을 낙인찍고 배제하는 구조는, 역사적으로도 현재에도 반복되고 있다. 박스트롤이 박스를 입고 다닌다는 설정은 그들의 정체성을 상징하며, 동시에 사회가 이들을 ‘규격화된 이상한 존재’로 몰아가는 기호이기도 하다. 아이들을 무섭게 하기 위한 공포심 유발, 사회 통제를 위한 적 만들기 등은 모든 편견의 전형적 메커니즘이다.

박스트롤을 향한 공포는 경험이 아닌 ‘전달된 이야기’를 통해 확산된다. 이는 우리가 소수자나 낯선 집단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입견 역시, 실제 접촉보다는 타인의 설명이나 미디어를 통해 형성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에그스는 박스트롤과 함께 자라며 그들이 얼마나 순하고 인간적인 존재인지 직접 경험하지만, 치즈브리지 시민들은 그저 자신이 들은 이야기만을 신봉한다. 이처럼 박스트롤은 사회적 타자화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은유 장치다.

치즈와 모자: 계급 구조와 위선의 상징

‘치즈브릿지’의 인간 세계는 치즈를 최고의 권력 상징으로 여긴다. 얼마나 고급 치즈를 먹고, 어떤 치즈 클럽에 소속되어 있는지가 곧 신분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는 사회다. 여기에 빨간 모자(Red Hat)는 상류 계급의 상징으로 등장하며, 이는 시각적으로도 매우 명확하게 구분되어 위계질서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박스트롤의 이야기와 병치되어, 이러한 계급주의적 구조는 편견이 작동하는 시스템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이 세계의 권력자 ‘아크헤바’는 박스트롤을 악마화하며 퇴치하겠다는 명분으로 사회적 지지를 얻고, 치즈 클럽의 일원이 되기 위해 광기에 가까운 집착을 보인다. 그러나 그는 치즈에 알레르기가 있어 실제로는 치즈를 먹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즈를 억지로 먹으며 계급의 상징을 유지하려는 모습은, 위선을 위해 진실을 포기한 인간 사회의 일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계급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배제할 대상’이 필요하다. 박스트롤은 바로 그 희생양이다. 아크헤바는 박스트롤이 실재하는 위협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들을 계속해서 제거 대상으로 삼는다. 이 장치는 현대 사회에서 ‘문제 집단’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매개로 권력을 유지하려는 정치적 전략과 매우 유사하다. 특히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며 지지 기반을 다지는 포퓰리즘의 구조와도 겹친다.

결국 치즈와 모자는 단순한 소품이 아니다. 그것은 억압과 권위, 위선과 차별의 상징이며, 그 속에서 인간 사회는 서로를 감시하고, 타인을 배척하며, 끊임없이 ‘우월함’을 증명해야 한다. 그리고 그 우월함의 기반은 늘 박스트롤과 같은 ‘다른 존재’를 만들어냄으로써 유지된다. 이는 계급이 작동하는 방식이며, 영화는 이를 매우 풍자적으로, 그러나 분명하게 비판한다.

다양성과 포용: 누가 괴물인가에 대한 질문

에그스는 인간이지만 박스트롤과 함께 자라며, 인간 세계와 박스트롤 세계 모두를 이해하는 존재로 성장한다. 그는 두 세계 사이에서 경계에 선 인물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양쪽 세계를 연결하고 화해를 이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이 설정은 다양성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 다문화·다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사회 통합의 중심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반복적으로 관객에게 묻는다. “진짜 괴물은 누구인가?” 외형적으로는 박스트롤이 기이하고 낯설지만, 그들은 상호 협력과 나눔, 창조성을 지닌 존재다. 반면 인간 세계의 권력자들은 탐욕과 위선, 혐오를 통해 사회를 조작하고 타인을 억압한다. 결국 괴물은 외형이 아니라 ‘행동’으로 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영화의 핵심 메시지다.

박스트롤이 스스로를 숨기고 방어하는 존재에서 벗어나 세상에 나서게 되는 결말은 매우 상징적이다. 이것은 소수자, 타자화된 존재가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더 이상 사회의 틀에 갇히지 않고 존재를 드러내는 선언이다. 에그스와 윈지의 연대는 기존 질서를 뛰어넘는 새로운 사회를 꿈꾸게 하며, 이는 다양성을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태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치즈’가 더 이상 절대적인 권력의 상징이 되지 않게 되고, 빨간 모자마저 무력해지는 모습은 계급의 해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인간과 박스트롤, 상류층과 서민이 공존하는 새로운 관계가 자리 잡는다. 이처럼 ‘박스트롤’은 단지 괴물과 소년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차별과 편견을 넘어서는 사회적 연대, 다양성의 수용, 그리고 진정한 포용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자 해답이다.

‘박스트롤’은 단순한 스톱모션 판타지가 아니다. 그것은 타자화된 존재를 향한 사회의 편견과, 계급 구조 속에 내재된 위선을 날카롭게 풍자하는 사회비판적 애니메이션이다. 박스트롤이라는 존재를 통해 우리는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 권력을 위한 조작, 그리고 다양성을 억압하는 구조를 직시하게 된다.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품고 있는 이 작품은, 어른과 아이 모두에게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진짜 괴물이 누구라고 생각하나요?”